본문 바로가기
◆ 상 상 ◆

가꿈과 바꿈(마음속 정원)

by ✪‿✪ 2022. 1. 19.
반응형

정원 속 아이
앞마당 속 아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길을 걷다가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으로 다니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또는 주변 누군가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에 심기가 불편해진 적이 있는가? 아니면, 집의 구조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거울 속 비친 자신의 모습이 불만족스러울 때가 있었는가?

 누구나 살아가면서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두 단어가 있었다. 바로 "가꿈"과 "바꿈"이다. 이렇게 가꿈과 바꿈에 대한 질문과 상상을 시작하게 되었다.

 

너는 누구, 나는 왜

 자신의 사고방식, 그리고 행동양식과 맞지 않는 누군가를 보면 반감이 생긴다. 그 대상이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일 때도, 내가 늘 알고 있던 지인일 때도,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일 때도 불편함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상대가 누구든 간에 나는 왜 불편함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그 사람을 누구라고 생각하기에 개입하려 하는 것이며, 나는 도대체 그 모습을 온당치 못하다고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가꾸는 것과 바꾸는 것

 지극히 개인적인 관점일 수도 있지만, 가꾼다는 것과 바꾼다는 것은 차이가 크다. 가꾼다는 말은 어떠한 대상을 존중해주며, 조금씩 변화를 주는 느낌이다. 반면에 바꾼다는 말에는 어떠한 대상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며, 기존의 것을 부정하는 듯한 어감마저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가꾸어간다는 말과 바꾸어간다는 표현에도 차이가 느껴진다. 자신을 가꾸어가는 것은 자신의 본모습을 사랑하며, 성장을 위해 조금씩의 변화를 연습하고 훈련해가는 느낌이다. 그에 반하여 자신을 바꾸려고 하는 사람의 마음에는,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크게 느껴진다. 자신의 모습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빠르게 이동하려는 듯한 느낌이다. 

 

마음속 작은 정원

 각자의 마음속에는 가꾸어야 할 작은 정원이 있는 듯하다. 그 정원은 자신이 가장 잘 볼 수 있지만, 지나가는 사람들도 담벼락 사이로 타인의 정원을 일부 바라볼 수 있다. 우리는 타인의 모습에서 그 사람 마음속의 정원을 조금씩 엿보게 되는 듯하다.

 

타인의 정원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 이유

당신이 본 것은

 당신이 본 것은 엄밀히 말하면, 그 사람의 정원이 아니다. 정원의 극히 한 부분일 뿐. 내가 잠깐 본 울타리 사이로 삐져나온 가시 안쪽에서는, 아름다운 장미꽃이 자라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보이는 모습 하나로, 그 사람의 정원을 쉽사리 판단해서는 아니 된다.

정해진 정원은 없다

 타인의 정원을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정원을 가꾸는 데에는 정해진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정원이 다를 것이고, 각자의 정원에 있는 식물들도 다를 테며, 그 식물들을 가꿀 수 있는 여건도 다를 것이다. 또한 같은 나무라도 조경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어떠한 모습이 정답이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모두의 정원이 똑같다면, 그게 정원이겠는가.

계속해서 변화한다

 정원은 살아있는 공간이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변화한다. 방치를 해도 변화하고, 가꾸어도 변화한다. 정원과 마찬가지로 정원의 주인도 살아있는 존재이기에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예전에 보았다고 생각하는 그 사람의 정원만을 기준으로, 지금의 정원을 판단하는 것은 두 번의 오류를 범하는 것이 된다.(예전에 봤던 정원도 전부가 아닐 것이며, 그때 전부를 보았다 하더라도 지금은 달라졌을 테니)

 

이웃집 정원을 볼 수 있는 법

 그렇다면 이웃집 정원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사실 이웃집의 정원을 볼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바로 이웃집에 초대받았을 때다. 누군가의 정원을 잘 안다고 생각할 때, 이러한 질문부터 던져보아야 한다. "난 그 사람의 정원에 초대받은 적이 있는가?" 그런 적이 없다면, 아직 그 사람의 정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물론 초대받았을 때가 오래전이라면, 지금은 또 달라졌겠지만 말이다. 

 

기쁜 교류와 불쾌한 교류

 나의 조경이 예쁘다고 생각하며 노하우를 물어오는 이웃집과 교류하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나의 정원에 그를 초대하고, 그의 정원에 나도 초대받으며, 서로의 정원을 소개하고 존중할 것이다. 하지만 원하지도 않는 이웃집의 담벼락을 넘어, 남의 집 나무를 나의 조경 노하우로 가꾸는 것은 유쾌하지 못한 일이다.

 비록 가꾸어주는 행동이라 할지라도, 주인의 의사가 담겨있지 않다면, 그것은 바람직한 가꿈이 아니다. 결과물이 만족스러워 나중에 주인이 개의치 않아해도, 그 교류는 여전히 불쾌하다. "가꿈"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관심이기에,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진심으로 돕고 싶은가

 타인의 정원을 바라볼 때, 당신은 진심으로 그 사람을 위해 돕고 싶은 마음이 드는가? 더 나아가, 그것을 내가 바꾸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니면 가꿀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 도움이 진실로 그 사람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나의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함인가? (필자는 "당신을 위한 음식"을 준답시고, 공격 2스푼, 비야냥 5스푼, 자기 과시 3스푼, 연민 1스푼과 그럴싸함 한 꼬집을 넣은 "괴식"을 준 적이 종종 있었다.)

 

진정 아끼는 사람인가

 진정 내가 아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수록, 그 사람을 바꾸려 하는 나의 말과 행동들을 조심해야 한다. 당신은 그 사람이 자신을 바꾸기보다 가꾸기를 바랄 테니. 그 사람이 스스로를 가꿀 수 있게, 그리고 앞으로도 스스로를 가꾸어갈 수 있게 도와주려면 내가 그를 바꾸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가꾸는 맛을 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 

얼마나 맛있게요?

 예전에 아기 엄마가 어린 아기에게 미음을 먹이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아기는 미음을 크게 먹고 싶어질 않아 보였고, 아기의 건강을 위해 엄마는 애써 미음을 먹이려 했던 상황이다. 아기 엄마는 이때, 억지로 미음을 아기의 입에 넣지 않았다. 아기의 엄마는 얼굴과 몸짓, 그리고 음성을 총동원하여 미음의 맛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이 미음이 얼마나 맛있게요?" 그 미음을 맛있게 먹는 엄마의 모습을 본 아기는, 놀랍게도 그 미음을 먹고 싶다며 칭얼대기 시작했다.

 

꽃이 향기가 되어

 정원 속 예쁘게 가꾼 꽃이 향기가 되어, 은은하게 퍼져나간다. 이처럼 자신의 정원을 가꾸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웃에게도 좋은 영향이 될 것이다. 담 너머로 보이는 나의 정원이 아름다워 보일 때, 이웃도 자신의 정원을 꾸미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까. 내가 가꿀 수 없는 것에 얽매이기보다, 내가 가꿀 수 있는 것을 가꾸어가며.

반응형

댓글